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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 체류기

도미니카 공화국 체류기 : 필기체맹

 



<2010년 8월 5일>

이곳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책에 쓰여진 글은 읽을 줄 알면서 자기들이 써주는 메모는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단어 조차도 필기체로 씌여 있으면..

"나는 이거 읽을줄 몰라"

그래서 항상 활자체로 또박또박 다시 써달라는 부탁을 하거나,
니가 불러주면 내가 쓰겠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왔다.



그렇다..
나는 필기체로 읽고 쓸 줄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한국에서 스페인어와 알파벳이 거의 같은 영어를 배울때도
나는 그 어느곳에서도 필기체를 쓰는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 부분에 있어서 아무 불편함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좀 멋있어 보여서 따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봤던 거 외에는..
필기체를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이곳에서 활자체만 읽을 줄 아는 반 바보가 된 것이다.
한번은 출장을 가서 처음 만난 사람이 때마침 갖고 있던 명함이 없자
자기 이메일 주소를 필기체로 휘갈겨 써주는데 도저히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알파벳을 하나씩 짚어가며 다시 적었다.

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일상 생활중에서 매번 닥치고,
그때마다 아는 단어조차도 읽지 못하는 문맹놀이를 해야하는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 나라의 국민성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되는)
조금만 못한다 싶으면 바로 무시해버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이 반 바보 놀이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필기체를 연습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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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가서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글씨 연습장을 구입했다.
한 권에 160페소 정도였던것 같다. (1200원 환율로 5200원 정도)
레벨은 1부터 10번까지였던가?? (정확하지 않음) 다양하게 있었다.
1번에 나와있는 단어들은 거의 아는거여서 한 3번쯤부터 시작하고 싶었지만
시작하려면 1번부터 차례대로 해야할 것 같은 강박에 1번을 구입했다.

역시.. 필기체로 써놓은것만 봐서는 뭘 쓴건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림을 보고 단어를 생각해낸 다음 하나씩 맞춰보는 작업을 한 뒤
연습을 시작했다.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기분.. ;;;
한글자씩 점선에 맞춰서 열심히 그리다보니..
옛날옛날, 나 유치원 다니면서 아이템플 하던 그 시절.. ㅋㅋ
깍두기 공책에 글씨연습하던 그 때가 생각이 났다.
한국말도 이렇게 배웠었지.. 싶은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국어책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섯번씩 써오기.
이런게 숙제였었다. 그냥 똑같이 배껴쓰기.
아니다. 국어도 아니고 "읽기", "말하기.듣기", "쓰기" 이렇게 나뉘어 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연필이랑 맞닿는 부분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얼마나 쓰고 또 썼던가.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3시간 30분 동안 공책 한 권을 다 써버리고 나니
속도 후련하고, 필기체로 씌여진 다른 단어들도 읽어지는것이 기분이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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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는 동료(소베이다)에게 필기체 공책 1번을 사서 연습하고 있다고 얘기하자
자기 딸은 No.6이라고 자랑을 한다.. ;;; (딸은 4살임..-_-)
그리고는 바로 어른들 중에서도 글씨가 안예쁜 사람들은 이걸로 연습한다고 바로 수습도 해준다.
뭐 어떻게 들어봐도 빨리 필기체를 마스터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4살짜리 아이도 필기체 공책 6번을 쓰는 마당에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읽고 쓸 줄 몰랐으니
그 동안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은것이 얼굴이 화끈거린다..


좋아..
기타학원에서 시험을 본 날 마트에 들렀다.
나의 성격상, 아무리 급해도 2,3,4,권을 차례로 연습해야 했지만..
소베이다의 도발??? 로 다 뛰어넘고 5번을 구입했다.
(사실 6번으로 점프할까 생각도 했는데.. 갑자기 문장만 가득 나와서 일단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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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어 필기체를 연습했을 뿐인데..
이제는 나도 읽을 수 있다.
쓰는 것 역시 아직 연습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내 이름과 연습한 단어 정도는 잘 써낼 수 있다.
새로 산 5번 노트도 한번에 읽어내려갈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대단한 발전이다. :)
 


Fredy ama mucho a su familia.(위 사진에 씌인 문장)

y Abigail ama mucho a su familia. :)



오래전부터 필기체를 써 온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금의 내 모습이 아주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뭐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이런 글까지 써올리는건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몰랐던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서야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오른손이 붓도록 연습하는 것 뿐이다.


중요한 건, 이 작은 노력으로 인해서
나는 나의 동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이 문화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단점을 하나 더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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